
공자는 춘추시대의 정치가 사상사 교육자이다.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며 예와 악을 정리하여 유학의 기초 경전을 정립하였으며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공자의 호칭에서 “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
공자는 노나라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안징재가 홀로 공자를 키웠다.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세대 결혼을 하고 20세에 자식을 얻었다.
그는 귀족임을 인정받고 싶었다. 무사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글과 지식으로 인정 받고 싶었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스승이 없었고,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배우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도 나온다. 그는 열다섯 살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서른 살에 이르러 한문에 기초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섰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원을 열었던 것이다. 그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가르쳤다.
그는 관료 생활을 하였다.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 학문적으로도 많이 발전을 보였다. 그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장하였다. 주공이 나라를 다스렸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세상을 만드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공자가 귀국한 후 그에게 배움을 청하려는 제자들이 엄청나게 모여들었다. 훗날에는 그의 제자가 3천 명을 넘어섰다.
노나라에 ‘삼환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은 제나라로 도망쳤고,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을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경공과 신하들에게 여러 진리를 가르쳤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바른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등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지식과 덕망으로 자신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안녕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중도재가 되었다. 52세 무렵 대사구로 지위가 올랐다.
제나라는 밀자를 파견하여 노나라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으나 공자는 이를 미리 꿰뚫어 보고 화를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어다. 삼환 씨의 세력을 꺾으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계환자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공자는 크게 낙심하였고 그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판단하고 벼슬을 버린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공자는 인을 기반으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주군들을 설득하였으나,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상을 받아주는 제왕은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그가 고육에 활용한 경전은 ‘육경’이라 불리는 ‘역’, ‘시’, ‘서’, ‘예’, ‘악’, ‘춘추’이다.그 당시 육경은 진귀한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속수 이상을 예물로 가져온 이에게 가르쳐주었다.
공자의 말년에 아들인 백어가 50세 나이로 죽었고, 아끼던 제자마저 잇따라 죽었다.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반추하여 말하길,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의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73세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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